가즈나 왕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즈나 술탄국에서 넘어옴)

가즈나비얀
غزنویان
963년~1186년
 

국기
국기
수도가즈나
(963-1163)
라호르
(1163 1186)[1]
정치
정치체제세습군주제
술탄
977-997
1160-1186

와지르
998-1013

12세기

사부크티긴 (초대)
쿠스라우 말리크 (말대)


아불 하산 이스파라이니 (최초)
아불 마알리 나스랄라 (마지막)
역사
 • 설립중세
963년
 • 멸망1186년
지리
1029년 어림 면적3,400,000 km2
인문
공용어페르시아어[2][3]
공통어아랍어(신학어)
튀르크어(군사어)[4]
종교
종교수니파 이슬람교
힌두교(인도인들 다수)
기타
현재 국가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란
파키스탄 파키스탄
인도 인도
이전 국가
다음 국가
사파르 왕조
사만 왕조
마문 왕조
힌두 샤히
구르자라-프라티하라 왕조
합바리 왕조
구르 왕조
셀주크 제국

가즈나 왕조(페르시아어: غزنویان, 로마자: Ġaznaviyā), 가즈나비얀 또는 가즈나 제국은 977년부터 1186년까지 이란, 호라산, 인도 북서부를 지배했던 페르시아화된 튀르크계 이슬람 왕조이다.

왕조의 개창자 사부크티긴은 튀르크계 노예 장군, 즉 맘루크로서 사만 토후국 밑에서 일했으나, 그의 주인 알프 티긴이 죽자 가즈니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왕조의 기반을 닦았다. 그의 아들 마흐무드는 왕조의 영토를 동쪽으로는 아무다리야 강, 인더스 강, 인도양 연안까지, 서쪽으로는 레이하마단까지 넓힘으로써 대제국을 건설했다.

마흐무드의 후계자 마수드 1세 통치 하의 가즈나 왕조는 1040년 단다나칸 전투의 패배 이후 셀주크 제국에게 호라산을 비롯한 서부 지역을 빼앗겼으며, 그 결과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북부로 영토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1151년, 바흐람 샤는 수도 가즈니를 구르 왕조의 알라 앗 딘 후세인에게 빼앗겼다. 이후 몇 번인가 도시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결국 가즈나 왕조는 제 2의 도시였던 펀자브의 라호르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1186년, 라호르마저 구르 왕조의 무이즈 앗 딘 무함마드(무함마드 고리)에게 함락당하면서 가즈나 왕조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역사[편집]

배경[편집]

8~9세기 초까지 번영을 누리던 중동의 아바스 칼리파국은, 9세기 중반부터 점차 바그다드 정부가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로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아바스 왕조의 동방 영토, 즉 호라산·중앙아시아 일대에는 여러 반독립적인 토후국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819년 건국된 사만 왕조도 그 중 하나였는데, 그들은 자신의 조상을 사산 제국의 위대한 영웅이자 찬탈자 바흐람 추빈에서 추적했으며 10세기 초반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 사만 왕조는 그 중심지를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부하라에 두었다. 이 곳은 북방의 대초원 지대와 상당히 근접해 있어 유목민들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었고, 따라서 사만 통치자들은 주변에 군사 작전을 개시하고 이슬람 국경을 방어함으로써 유목민들을 막는 조상의 의무를 대대로 물려받았다.

893년, 사만 왕조의 대표적인 통치자 중 한명인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는 북쪽으로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카를루크 튀르크족의 근거지인 탈라스를 정복했으며, 그 과정에서 막대한 전리품과 노예들을 운반했다. 이후에도 사만 왕조 국경에서 지속적인 소규모 군사 활동이 보고되었으며, 그들의 군대는 국경을 넘어 대초원을 습격했다. 그 결과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의 노예들이 대거 이슬람 세계로 공급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광부나 군인 등으로 착취당했다.

10세기 후반, 사만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세지는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력이 뛰어난 튀르크계 노예 병사(맘루크/굴람)들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동시대의 비잔티움 제국바랑기아인 또는 라틴인 용병들을 고용하거나, 이전의 로마 제국게르만족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포에데라티로 임명한 것, 그리고 아바스 칼리파국의 군부에서 튀르크계 장군들의 비율이 점차 높아진 현상 등과 연결될 수 있다.

961년의 사만 왕조. 호라산트란스옥시아나 등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지역이 맘루크 장군들에게 장악당한 상태였다.

945년까지, 사만 왕조에서는 맘루크 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왕은 명목상의 권력만 가진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렸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이란의 부와이흐 왕조이라크를 정복하고 아바스 칼리파를 괴뢰로 만들어버린 것과 유사했다.

기반을 다지다[편집]

사부크티긴[편집]

가즈나 왕조의 개창자 사부크티긴(페르시아어: سبکتگین)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마도 940년대 즈음 오늘날 키르키스스탄 동부 지역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출생지인 바라스칸(Barskhan, 오늘날 키르키스스탄 바르스쿤)은 당시 카를루크 튀르크족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그 자신도 카를루크 혈통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으나, 이것 역시 확실하지 않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Lahore" Encyclopædia Britannica
  2. Homa Katouzian, "Iranian history and politics", Published by Routledge, 2003. pg 128: "Indeed, since the formation of the Ghaznavids state in the tenth century until the fall of Qajars at the beginning of the twentieth century, most parts of the Iranian cultural regions were ruled by Turkic-speaking dynasties most of the time. At the same time, the official language was Persian, the court literature was in Persian, and most of the chancellors, ministers, and mandarins were Persian speakers of the highest learning and ability"
  3. "Persian Prose Literature." World Eras. 2002. HighBeam Research. (3 September 2012);"Princes, although they were often tutored in Arabic and religious subjects, frequently did not feel as comfortable with the Arabic language and preferred literature in Persian, which was either their mother tongue—as in the case of dynasties such as the Saffarids (861–1003), Samanids (873–1005), and Buyids (945–1055)—or was a preferred lingua franca for them—as with the later Turkish dynasties such as the Ghaznawids (977–1187) and Saljuks (1037–1194)". [1]
  4. C.E. Bosworth, The Ghaznavids:994–1040,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63), 134.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