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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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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სამეფო
sakartvelos samepo
1008년~1490년
 

 

 

국기
둘서트, 피시가노 형제, 그리고 다른 민족들에 따른 14세기와 15세기의 조지아의 국기[1]
문장
바쿠슈티 왕자의 아틀라스 (1745년경)에 따르면 "전 조지아 왕국"의 문장
Coat of arms of the Kingdom of Georgia under khan (Grünenberg Wappenbuch, 1480)
그뤼넨베르크에 따르면 "칸 통치하의 조지아 왕국"의 문장 와펜부치 (1480년)[2][3]
1220년 조지아 왕국은 영토 확장의 절정기에 있었다.
1220년 조지아 왕국은 영토 확장의 절정기에 있었다.
수도
정치
정치체제봉건군주제
군주
978년 ~ 1014년

1446년 ~ 1464년

바그라트 3세 (초대)

기오르기 8세 (말대)
역사
역사적 시대중세 초기 ~ 중세 후기
 • 설립

 • 조지아 황금기

 • 일시 멸망

 • 몽골의 지배

 • 티무르의 침략

 • 멸망
1008년

1122년 ~ 1226년

1245년 ~ 1247년

1238년 ~ 1327년

1386년 ~ 1403년

1490년
인문
공용어중세 조지아어
그리스어
라즈어
아르메니아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경제
통화비잔틴/사산 주화
(12세기까지)

디르함
(1122년 이후)[4]
종교
종교조지아 정교회
기타
이전 국가
다음 국가
압하지야 왕국
이베리아 왕국
카헤티 왕국
헤레티 왕국
아르메니아 왕국
트빌리시 토후국
카르틀리 왕국
카헤티 왕국
이메리티 왕국
삼츠헤 공국
1124년 이후 조지아 군주들의 완전한 칭호는 "왕중의 왕, 동서양의 아우토크라토르, 메시아의 검, 압하지야의 왕, 이베리아의 왕, 카헤티의 왕, 아르메니아의 왕, 시르반의 주인, 헤레티의 왕"이었다.

조지아 왕국(조지아어: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სამეფო, 로마자: Sakartvelos samepo)은 조지아 제국이라고도 불리며,[5] 1008년에 건국되어 1490년까지 존속했던 중세 유라시아의 군주국이었다. 그것은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다비트 4세타마르 여왕의 통치 아래 정치적·경제적 힘의 절정기에 다다랐으며, 이 시기는 조지아 역사에서 "황금 시대"로 불린다. 조지아는 곧 동방 기독교의 선봉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그들이 구축한 범캅카스 왕국과[6] 그 연결망은 동유럽에서 아나톨리아와 이란 북부까지 뻗어 있었으며, 또한 조지아 왕국은 예루살렘십자가 수도원그리스이비론 수도원과 같은 타국의 종교적 유산을 유지했다. 그것은 오늘날 조지아의 주요한 역사적 전조이기도 하다.

몇 세기 동안 지속된 조지아 왕국은 13세기에 몽골의 침공으로 한 차례 멸망했지만, 1340년대에 이르러서 그들의 주권을 다시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 동안 흑사병의 유행 및 티무르의 침공이 일어나 국가의 경제, 인구, 도시 중심지가 모조리 황폐화되었고, 오스만 제국비잔티움 제국·트라페준타 제국을 정복함에 따라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다. 15세기 중반이 되면 조지아 왕국은 단지 명목상으로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1466-1490년 사이에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왕국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1490년이 되자 최종적으로 조지아 왕국은 해체되었으며, 이 지역은 바그라티온 왕조와 그의 경쟁 분파들이 주도하는 더욱 작은 정치적 분열체로 나뉘게 되었다.

배경[편집]

라지카이베리아로 알려졌던 조지아인의 초기 왕국들은 서기 3~6세기에 걸쳐 벌어진 로마-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 봉신국으로 전락하거나 멸망하고 말았다. 그 후 이 지역은 7세기 초 아랍 무슬림의 정복으로 이슬람 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바그라티온 가문 출신의 이베리아 왕족들은 아랍의 압제에 맞서 싸우면서 타오-클라르제티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명목상 봉신으로써 이베리아 왕국을 세웠고, 888년까지 자신들의 지배권을 조지아 중부 지역(카르틀리)로 확장하면서 기반을 다졌다. 이 무렵 바그라티온 왕조는 세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주요 거점은 타오였으며 나머지는 클라르제티였다.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조지아 침공(736년)은 압하지야인, 라즈인, 이베리아인의 동맹에 의해 격퇴되었다. 아랍 세력으로부터의 지속되는 침공,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반발심의 증가는 조지아계 국가들이 단일 봉건 군주제로 통일되는 과정의 추진제가 되어주었다. 9세기에 조지아 정교회콘스탄티노플에서 분리되었고, 므츠헤타 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했다. 교회 언어가 기존의 그리스어에서 조지아어로 바뀐 것도 이 무렵이다.[7]

역사[편집]

조지아의 통일[편집]

압하지야베디아 대성당에 있는 바그라트 3세의 프레스코화
  다비트 3세가 사망하기 직전인 1000년 무렵 이베리아 왕국의 영토

10세기 동안 이베리아 왕 다비트 3세는 주변의 적대 국가들을 모조리 정벌하면서 그 위세를 떨쳤다. 그의 치세 동안 이베리아 왕국의 영역은 북쪽의 타오-클라르제티부터 남쪽의 반 호수까지 이르렀다. 978년, 압하지야에서 친 이베리아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친척 구르겐의 친아들이자 자신의 양자였던 바그라트 3세를 압하지야의 왕으로 임명했다.[8]:67–68

이후 다비트 3세와 구르겐이 잇달아 사망하면서, 바그라트 3세는 타오-클라르제티와 압하지야 전역을 석권하는 유일한 조지아 군주로 떠올랐다. 1008년, 그는 공식적으로 통일된 조지아 왕국의 군주를 선언함으로써 조지아 왕국을 출범시켰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에게 복종하길 거부하는 카헤티 왕국에 대한 군사 원정을 단행하여, 1010년에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을 "압하지야인, 란스, 카흐인, 카르트벨인의 왕"이라 칭했다. 또한 바그라트는 자신의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왕권을 위협하는 클라르제티의 바그라티온 제후들의 자치권을 대폭 약화시켰다.

이후 바그라트는 아들 기오르기 1세의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재차 사촌들을 숙청했으며, 그들의 영역을 대부분 합병시켰다. 이리하여 조지아 전역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클라르제티 공작 슴바트 3세의 아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달아난 뒤 비잔티움 제국의 후원을 받고 그에게 맞섰으나,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9]

바그라트 3세의 집권은 바그라티온 가문이 조지아에서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다는 것과, 수 세기 동안 이 지역을 괴롭혀왔던 권력 투쟁이 종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타오트빌리시와 같은 영토 일부가 각각 비잔티움, 아랍의 지배 하에 남아있었지만, 바그라트 3세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외교 정책을 펼침으로써 이들과의 별다른 분쟁 없이 그의 통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과 평화[편집]

1045년 무렵 비잔티움 제국(노란색)과 조지아 왕국(하늘색)

기오르기 1세의 통치는 주로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990년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반역자 바르다스 포카스를 지원한 다비트 3세를 굴복시키고 인접한 이베리아 영토를 강제로 할양받은 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기오르기 1세는 이를 되찾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내 1015~1016년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 제1제국과 전쟁을 벌이자, 그는 이 틈을 타서 곧장 비잔티움 국경을 침범한 뒤 여러 지역을 약탈하고 타오를 점령했다.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하고 불가리아 전역이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제 바실리오스 2세는 병력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조지아 정벌에 착수했다. 약 2년에 걸친 전쟁 끝에 승리를 가져간 것은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이에 따라 기오르기 1세는 타오 지역과 서남부 영토 일부를 할양해야 했다. (나중에 이베리아 테마로 조직됨). 이때 그의 어린 아들도 인질로서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다.

기오르기 1세가 1025년에 사망하자, 8살 난 그의 아들 바그라트 4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모후 마리암이 클데가리 총독 리파리트 4세 및 카르틀리 공작 이바네와 함께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타오, 트빌리시, 카헤티, 헤레티와 같은 대부분의 조지아 지역들이 외세의 지배 하에 들어가거나 독자적인 제후들의 통치를 받았으며, 귀족들의 충성심도 대단히 의심스러워졌다.

튀르크 대침공[편집]

11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셀주크 제국이 페르시아를 거쳐 소아시아 일대로 침입해왔고, 이에 따라 조지아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 더 많은 협력이 이루어졌다. 바그라트 4세의 딸 마리아는 1066~1071년 사이에 비잔티움 황제 미하일 7세 두카스와 결혼하기도 했다.

1065년,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카르틀리 지역을 침공하여 트빌리시를 점령하고 모스크를 건설했다.[10] 그는 카르틀리에 총독을 임명하고 돌아갔다. 이에 기오르기 2세는 반격을 개시하여 셀주크 총독을 무찌르고 카르틀리를 겨우 탈환했다. 또한 다비트 3세가 바실리오스 2세에게 양도한 이래로, 조지아와 비잔티움 제국간의 분쟁의 근원이 됐던 타오 일대를 비잔티움 총독 그리고리오스 파쿠리아노스로부터 공식적으로 돌려받았다. 이는 만지케르트 전투 후 셀주크의 지속적인 공세에 직면한 제국이 조지아의 도움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제국은 그에게 쿠로팔라테스에 더해 카이사르 칭호를 추가로 수여하며 동부 국경을 방비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후 셀주크 제국이 왕위 계승자들 간의 내전으로 일시적인 혼란에 빠지자, 기오르기 2세는 1074년 파트스키시 전투에서 간자의 셀주크 총독을 크게 물리쳤다.[11] 그러나 1076년, 단독 군주로 즉위한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 1세가 조지아를 침공하여 여러 마을과 도시를 파괴했다. 이후 1079년부터 대대적인 침공이 가해지면서 조지아 전역이 황폐화되었다. 결국 그는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셀주크 술탄에게 충성을 서약한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구걸해야 했다.

조지아 레콘키스타[편집]

다비트 4세[편집]

시오-므비메 수도원에 그려진 다비트 4세의 프레스코화
다비트 4세 치하 조지아 왕국의 영토

1088년, 대규모 지진이 조지아를 강타하면서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튀르크인들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인해 파탄 지경에 놓여 있던 민심이 이로 인해 폭발 직전까지 이르자, 기오르기 2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089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권좌에서 물러났다.

실패와 굴욕으로 점철된 치세를 보낸 끝에 불명예스럽게 퇴위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다비트 4세는 그의 궁정 장관 콘디디의 기오르기와 함께 국가 재건 사업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튀르크인들에게 수차례 패배하여 사기가 떨어진 군대를 대대적으로 재편성했고, 소수의 귀족과 왕족이 지휘하고 농민군이 주축이 된 몇 개의 소규모 부대를 조직한 뒤 산악 지대와 숲속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했다.

1089~1100년까지 실시된 이러한 작전은 대개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은 다비트 4세는 1099년에는 셀주크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튀르크인들이 물러감에 따라 많은 조지아인들이 그들의 터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덕분에 전쟁으로 파괴된 마을이 재건되었을 뿐만 아니라 때에 맞춰 농업 진흥 정책이 실시됨으로써 황폐화되었던 왕국의 경제가 어느정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편 당시 국제 정세는 조지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때 서아시아 전역에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셀주크 제국은 1092년 말리크샤 1세가 사망한 뒤 극심한 내분에 시달렸다. 여기에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이 벌어지면서 아랍권의 시선은 십자군 쪽으로 쏠렸다. 이것은 내부를 대거 정비하여 외부로의 상당한 국력 투사가 가능해진 조지아 왕국에게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1118년까지, 카헤티아그사르탄 2세와 같은 수많은 지역 통치자들이 다비트 4세의 군사 원정 앞에 모조리 쓸려나갔다. 도중에 그는 인근의 이슬람 토후국들에 대한 원정 역시 감행하기도 했다. 1110년 삼쉬빌데가 조지아군에게 함락되었으며 이를 되찾기 위해 쳐들어온 무슬림군 역시 섬멸되었다. 1115년, 조지아군은 여세를 몰아 루스타비를 공략함으로써 트빌리시를 이슬람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켰다.

1118~1120년 사이에는 수만 명의 쿠만인킵차크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주요한 군사 개혁이 이루어졌다. 다비트 4세는 이들에게 정착할 수 있는 토지를 주고 정규군으로 편입시켰으며, 주로 셀주크 제국과 인접한 국경 변경 지역의 방비를 맡겼다. 이것은 다비트 4세가 킵차크 칸의 딸 구란두크트와 결혼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은 덕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1120년에 들어, 다비트 4세는 이전보다 더욱 팽창적인 외부 정책을 펼쳤다. 그는 이웃한 시르반카발라를 침공했고, 거기서부터 캅카스 동부와 남서부에 걸친 셀주크 영토를 성공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121년, 갈수록 강성해지는 조지아 왕국에 위협을 느낀 인근의 토후국들이 셀주크 제국의 마흐무드 2세와 연합하여 지하드를 선포하고 쳐들어 왔으나, 디드고리 전투에서 다비트 4세에게 대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비트 4세는 당시 조지아에 남아 있던 마지막 무슬림 정착지 중 하나인 트빌리시를 점령하고 그곳을 조지아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함으로써 조지아 황금기의 시작을 알렸다.

1123년, 다비트 4세는 아제르바이잔의 시르반샤를 공격하여 영토의 절반을 빼앗아갔으며 조지아 남부의 마지막 셀주크 요새인 드마니시를 해방시켰다. 1124년에는 카스피해의 중요한 항구 도시인 데르벤트를 공략하고 헤레티 왕국 역시 복속시켰다. 얼마 후 다비트 4세는 시르반과 함께 아르메니아의 역사적인 수도 아니를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탈환했으며, 자신을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왕"으로 칭했다. 이리하여 캅카스의 무슬림 권력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조지아 왕국의 영토는 흑해에서 카스피해까지 이르는 캅카스 남부 전체를 뒤덮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젤라티 수도원의 오늘날 모습

군사적인 업적 이외에도, 그는 조지아 교회 건설을 대대적으로 후원했고, 북부의 현지 주민들과 경제 및 문화 교류를 장려했으며, 캅카스 남부에서 대 캅카스 산맥을 거쳐 캅카스 북부까지 이어지는 교역로를 통제함으로써 일대에 대한 조지아 왕국의 영향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러면서도 비잔티움 제국에 자신의 딸 카타를 시집보내,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양자의 동맹 관계를 굳건히 했다.

다비트 4세는 당시 "새로운 헬라스", "제 2의 아토스"라 알려진 젤라티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또한 회개의 찬송가와 여덟 개의 자유곡 시편을 작곡하는 등, 예술적으로 유능한 군주이기도 했다.

디미트리오스 1세[편집]

1140년에 그려진 마츠흐바라시 수도원의 데메트리오스 1세 대관식 프레스코화

다비트 4세의 아들 디미트리오스 1세 치하에서 조지아 왕국은 계속 번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트빌리시의 무슬림들에게 세금 면제와 종교적인 특권을 주는 등 관용 정책을 베풀었지만, 한편으로 조지아 왕국과 적대하는 외부의 무슬림 통치자들에게는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1129년 또는 1130년, 그는 자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시르반샤를 제압한 후 미누히르 2세를 그곳의 지배자로 앉혔다. 이후 시르반샤는 조지아 왕이 요구할 때마다 그들의 군대를 제공해야 하는, 사실상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1130년, 아흘라트 토후국의 술탄 샤 아르멘 쇠크멘 2세가 아니를 조지아 왕국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지역을 침공했다. 디미트리오스 1세는 이에 맞섰지만, 다른 전선에서도 적이 준동하자 아버지 대부터 조지아와 협력한 샤다드 왕조의 아미르 파들 이븐 마흐무드에게 아니를 양보해야 했다.

1139년, 그는 간자를 공격하여 중대한 타격을 입힌 뒤, 도시의 성문을 떼어내어 조지아로 가져오고는 젤라티 수도원에 기증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들의 극심한 저항으로 인해 도시와 주변 지역을 오랫동안 장악할 수 없었다. 이후 1143년에 간자는 엘디귀즈 왕조의 술탄에 의해 탈환되었다. 아르메니아의 학자 므키타르 고쉬에 따르면, 디미트리오스 1세는 결국 간자를 정복했지만, 엘디귀즈 왕조와 결혼 동맹을 맺을 때 지참금으로 그곳을 넘겼으며, 술탄은 휘하의 아미르를 임명하여 간자를 통치했다고 한다. 이 무렵 이복형제 바크탕을 왕위에 옹립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그는 음모자들을 체포해 모조리 처형하고 바크탕을 실명시킨 뒤 감옥에 보내 곧 죽게 했다.

1154년, 아니의 아미르 파크르 앗 딘 샤다드는 그의 주군 살투크 2세에게 당신의 딸을 아내로 삼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는 디미트리오스 1세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얼마 후, 살투크는 봉신으로 삼아달라는 파크르 앗 딘의 요청을 수락하고 아니로 이동하던 중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조지아군의 습격으로 사로잡혔다. 이웃 무슬림 통치자들과 살투크의 아들들이 10만 디나르를 제공하며 아버지를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살투크가 조지아와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석방했다.

비록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위 계승과 관련된 파괴적인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강력한 군대와 함께 조지아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한편 재능 있던 시인인 디미트리오스 1세는 또한 조지아의 종교 음악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지대한 공헌을 계속했다. 그가 작곡한 찬송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포도밭의 당신≫이다.

기오르기 3세[편집]

디미트리오스 1세는 1156년 그의 아들 기오르기 3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아버지보다 더욱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외부 정책의 단계를 시작했다. 즉위한 그 해, 기오르기 3세는 남부의 아흘라트 토후국을 상대로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그들의 영토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수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았다. 1161년에는 옛 바그라투니 왕국의 수도였으며 다비트 4세 시절 조지아에 복속되었다가 디미트리오스 1세 대에 다시 무슬림에게 넘어갔던 아르메니아의 아니를 탈환하고, 이바네 오르벨리 장군을 그곳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이에 아흘라트 토후국의 샤 아르멘 쇠크멘 2세, 디야르바키르의 통치자 코트바드 디닐 가지, 에르주룸의 알 말리크 등이 연합하여 조지아 왕국에 대항했지만, 기오르기 3세는 이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162년 여름, 3만 명에 달하는 조지아 대군이 진군하여 아르메니아의 또 다른 역사적인 도시 드빈을 점령했다.

바르치아 유적지에 그려져 있는 기오르기 3세의 프레스코화

1163년 초 엘디귀즈 왕조샴스 웃 딘 일데니즈, 아흘라트 토후국의 세이페틴 베테무르, 아마딜르 토후국의 아르슬란 아바, 아르젠의 아미르 파흐룻 딘, 살투크 2세 등으로 구성된 무슬림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조지아를 침공했다. 조지아군은 이들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으며, 이슬람 군대가 가기 요새를 공략하고 게가르쿠니크 일대를 황페화시킨 뒤 아니로 진군했다. 하지만 1166년 초 기오르기 3세는 결정적인 반격을 가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이후 그는 아란으로 진군하여 간자를 탈환하고 일대를 황폐화시켰으며, 막대한 재물과 포로들을 확보한 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일데니즈가 휴전을 제안하자, 그는 이를 수용하여 아니를 샤다드 왕조에게 돌려 주었다. 그러나 그는 1174년 재차 아니를 점령하고 이바네 오르벨리를 그곳의 총독으로 삼았다. 이후 일데니즈는 다른 무슬림 통치자들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 조지아를 침공했는데, 조지아인들은 첫 번째 공격은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나 두 번째 공격에서는 아니를 상실하고 말았다. 1175년에 아니는 재차 샤다드 왕조에게로 돌아갔다.

황금기[편집]

타마르 여왕 통치 하의 조지아 왕국
타마르의 모노그램이 특징인, 조지아어와 아랍어 둘 다 새겨진 1200년대의 조지아 구리 동전

통일 군주제는 11세기 내내 비잔티움 제국셀주크 제국 사이에서 불안정한 독립을 유지했으나, 셀주크인들의 공격을 격퇴하고 1122년 트빌리시를 재정복함으로써 조지아의 통일을 본질적으로 완성한 "건설자" 다비트 4세(1089–1125)의 통치 하에서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반복되는 왕조 내부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조지아 왕국은 디미트리오스 1세(1125–1156)와 기오르기 3세(1156–1184), 특히 그의 딸 타마르(1184–1213)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 번영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 그리고 셀주크 제국의 해체로 조지아는 오늘날의 러시아 남부에서 이란 북부로, 그리고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 반도로 뻗어나가는 이 지역의 우세한 국가들 중 하나가 되었다. 조지아 왕국은 대략 11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반에 걸친 중세의 역사적인 시대(조지아 황금기)를 가져왔으며, 이 기간 동안 조지아는 전무후무한 정치적·경제적 발전의 정점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군사적인 팽창 외에도 건축 양식, 회화 기법 및 문학 등의 대단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조지아 정교회 미술의 번영과 세속적인 문학 작품들의 놀라운 탄생들이 이어졌다. 이것은 또한 소위 조지아 르네상스(또는 동방 르네상스)를 포함했는데, 이 기간 동안 조지아 왕국에서는 다양한 인문 활동, 철학 및 건축과 같은 예술 분야가 대단히 융성하기도 했다.

타마르 여왕[편집]

조지아 왕국의 팽창을 표시한 위치 지도
수도
일시적으로 점령된 도시와 요새들
완전히 정복된 도시와 요새
주요 전투

1184년, 조지아 왕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타마르는 재위 초기부터 귀족들의 대대적인 반발에 부딪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남편 유리 보골류브스키가 일으킨 쿠데타를 포함한 몇몇 내부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귀족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후 타마르는 스스로를 "mepet mepe"(왕 중의 왕)이라 칭하며 그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표명했다.

1190년대 초부터 조지아 왕국은 점차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지역에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했고, 곧 그곳의 이슬람 왕조들(엘디귀즈 왕조, 시르반샤)과 충돌하게 되었다. 1195년, 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 군대가 샴키르 전투에서 엘디귀즈 아타베그 아부 바크르를 대파한 뒤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엘디귀즈 왕조는 크게 약화되었으며 시르반샤는 조지아 왕국의 봉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쿠르드족 출신의 형제 자카레와 이바네 음하르그르젤리는 아라라트 평원으로 진격, 그곳의 요새와 도시들을 모조리 점령하고 샤다드 왕조로부터 아니를 탈환했다. 이후 두 형제는 아니를 기반삼아 주변의 이슬람 토후국들을 잇따라 공략함으로써 중앙 아르메니아 일대를 평정했다.

이러한 조지아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룸 술탄국의 통치자 술레이만샤 2세는 휘하 아미르들을 규합하여 조지아로 진격했다. 이때 그는 타마르에게 서신을 보내 그녀를 "단순한 여왕"이라 부르면서, 그녀가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아내로 맞이하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여노예로 삼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타마르는 군대를 소집한 뒤 교회 발코니에서 이교도의 침략으로부터 가족과 교회를 수호하라고 연설했다. 1203년 또는 1204년, 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군은 술레이만샤 2세를 상대로 바시아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타마르와 그녀의 아버지 기오르기 3세를 묘사한 프레스코화. 베타니아 수도원에 그려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1203~1205년 사이, 조지아 왕국은 드빈을 점령하고 두 차례에 걸쳐 아흘라트 토후국으로 쳐들어갔으며, 카르스에르진잔의 아미르들을 모두 제압했다. 1206년 에르주룸의 아미르가 조지아 왕국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자, 다비트 소슬란의 지휘 아래 조지아 군대는 아라스 강 주변의 요새들과 마을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카르스의 아미르는 아흘라트 통치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후자는 이에 응하지 못했고, 곧 1207년 아이유브 술탄국에게 점령되었다.

1209년 조지아 왕국은 아이유브 술탄국의 아르메니아 고원 통치에 도전했고, 기독교 군대에 의한 해방 전쟁을 이끌었다. 조지아 군대가 아흘라트를 포위하자, 아이유브 술탄 알 아딜자지라의 아이유브 아미르 알 아와드를 지원하기 위해 다른 아이유브 제후국들 뿐만 아니라 홈스, 하마, 바알베크에서 군대를 끌어모아 곧장 진격했다. 포위전이 진행될 즈음 이바네 음하르그르젤리가 실수로 적군에게 사로잡히면서 전세가 조지아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알 아와드는 그를 석방하는 대가로 30년 간의 휴전을 맺기를 요청했고, 따라서 조지아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조지아의 아르메니아로의 팽창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반 호수 일대는 다마스쿠스아이유브 아미르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자카레 음하르그르젤리의 아제르바이잔~페르시아 원정로

1207년 다비트 소슬란이 병사한 후에도 조지아의 확장은 지속되었다. 1209년 부활절에 엘디귀즈 왕조 봉신인 아르다빌의 통치자가 아니를 습격하여 기도 중이던 12,000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 소식에 분노한 타마르는 자카레 음하르그르젤리에게 군대를 주어 아제르바이잔 응징을 명령했다. 1210년, 자카레와 조지아 군대는 라마단 기간에 아르다빌을 급습했고, 나흐츠반을 지나 줄파, 마란드, 타브리즈, 잔잔, 카즈빈, 고르간으로 계속 진군하면서 도중에 마주친 여러 정착지를 약탈했다. 이 원정으로 조지아 왕국의 영향력은 아제르바이잔을 넘어 페르시아 북부까지 도달했고, 여러 도시들이 타마르에게 복종을 맹세하며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타마르 치세에 벌어진 가장 놀라운 사건 중 하나는 1204년 흑해 연안에 트라페준타 제국이 수립된 일이었다. 그 나라의 창건자는 타마르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1세였다. 그녀는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이 붕괴된 틈을 이용하여 조지아의 남서부 지역에 우호 국가를 마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타마르는 트라페준타 제국이 그곳에 자리를 잡도록 상당한 지원을 해줌으로써 그들을 조지아 왕국의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발칸 반도근동 지역에 설립된 중세 조지아 수도원들을 표시한 지도

다른 한편으로, 타마르는 아이유브 술탄국에 의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십자군이 패배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국제 무대에서 조지아 왕국이 중동 기독교인의 수호자로 인식되도록 유도했다. 조지아 선교사들은 북부 캅카스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그녀의 후원으로 지중해 동부 연안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수도원 공동체가 대거 설립되었다. 중세 조지아 연대기는 이집트에서 불가리아, 키프로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그녀의 지원 덕분에 설립되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써, 타마르는 중동, 그중에서도 특히 예루살렘의 교회를 보호하는 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살라흐 앗 딘 유수프의 전기를 기술한 바하 앗 딘 이븐 샤다드에 따르면, 1187년 살라흐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타마르가 사절을 보내어 예루살렘에 있는 조지아 수도원의 몰수된 재산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후 살라흐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녀의 이같은 노력은 성공한 듯하다. 또한 그의 다른 기록에는 타마르가 성십자가를 얻기 위해 비잔티움 황제보다 더 많은 액수를 제시한다고 기술했다.

당시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자크 드 비트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또한 동양에는 매우 호전적이고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며, 신체가 강건하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들은 전적으로 이교도들의 나라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들은 특별히 성 게오르기우스를 경외하고 숭배하기 때문에 조지아인이라고 불린다. 주님의 성묘를 순례하러 올 때마다, 그들은 신성한 도시로 당당히 행진한다[...] 왜냐하면 그 어느 사라센인들도 감히 그들을 추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기독교세속주의, 비잔티움페르시아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조지아 문화가 번영했다. 하지만 조지아인들은 스스로와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왕권을 신에게서 받았음을 천명하는 조지아식 군주제와 함께 계속 이슬람 동방이 아닌 비잔틴 서방과 그들을 동일시했다. 한편 조지아 정교회의 건축 양식이 재설계되고, 일련의 대규모 돔형 대성당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지아 교회의 기념비적인여왕 초상화는 대체로 비잔티움 예술을 그 모델로 삼았지만, 여성의 아름다움과 이상형을 강조하는 페르시아 예술의 특징도 어느정도 가미되어 있다.

조지아인들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이슬람 세계와 꾸준히 무역 거래를 이어감으로써 그들의 문화를 일부 수용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조지아어·아랍어 양측의 언어로 쓰여진 당시의 조지아 주화에 반영되었다. 1200년경 타마르의 이름으로 주조된 동전의 한쪽에는 현지식으로 변형된 비잔티움 동방 정교회 상징물이, 다른 한쪽에는 그녀를 "메시아의 대변자"로 묘사하는 아랍어 글귀가 적혀 있었다. 같은 시기에 서방에서 전해진 기독교식 도덕과 가부장적 문화가 퍼지면서 이런 류의 내용을 서술한 조지아 연대기가 계속해서 번성했고, 이를 현지식으로 재해석한 독창적인 세속 문학이 숱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기사도 시대"의 이상을 기념하고 조지아 문학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추앙받는 서사시 《표범의 가죽을 쓴 기사 vepkhist'q'aosani》가 창작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타마르의 통치 아래 최대 영토 범위와 영향권에 도달한 조지아 왕국

타마르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조지아의 국력과 영향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녀의 치세에 조지아 왕국은 북쪽의 캅카스 산맥에서 남쪽의 에르주룸, 북서쪽의 지기이에서 남동쪽의 간자까지 이르는 범캅카스 제국을 형성했다. 또한 아르메니아 북부 및 중부의 자카르 왕조, 아제르바이잔의 시르반샤가 조지아의 통치에 순종하며 스스로를 종속국으로 낮추었으며, 서남부의 트라페준타 제국은 그들의 충실한 동맹임을 자처했다. 동시대 조지아의 역사학자는 타마르를 "폰토스 해에서 흑해, 카스피 해에서 스페리데르벤트, 그리고 캅카스 전역에서 하자리아스키티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땅의 주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녀는 치세 말기에 아들 기오르기 4세를 공동 군주로 임명하고 함께 통치하다가, 1213년 1월 13일 수도 트빌리시 인근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에는 몰랐을 테지만, 그녀의 사망은 조지아 황금시대의 종말을 예고했다.

유목민의 침입[편집]

몽골의 침략과 왕국의 분열[편집]

몽골의 조지아 침입 경로와 쿠난 전투를 표시한 지도

타마르 사후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4세에르주룸, 나흐츠반, 아흘라트의 아미르들을 상대로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자신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하고, 아나톨리아이란에서 조지아의 패권을 재확인하는 등, 그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황금 시대를 계속 이어가는 듯 했다. 그런데 그가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던 1221~1222년 무렵, 수부타이제베가 이끄는 몽골 군대가 쳐들어와 쿠난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크게 물리쳤고, 기오르기 4세는 이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요절하고 말았다. 그는 생전에 아들 다비트 7세를 얻었지만, 귀족들과 교회가 다비트 7세의 어머니가 평민 출신인 것을 문제삼아서 그의 즉위에 격렬히 반대했으므로 대신 기오르기 4세의 누이 루수단이 여왕으로 등극했다.

1225년, 호라즘 제국 최후의 군주였던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몽골 군대를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피신했다. 그는 타브리즈를 본거지로 삼고 호라즘 왕조의 잔여 병력을 규합한 뒤, 루수단에게 위협적인 편지를 보내면서 복종을 요구했다. 조지아 측이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 그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며 조지아 동부를 휩쓸었다. 1225년, 조지아군은 가르니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했으며 아르메니아는 그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되었다. 이듬해에는 호라즘 군대가 트빌리시를 점령한 뒤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행했다. 이에 루수단은 조지아 서부로 도망친 뒤, 일부 요새를 넘겨주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더 이상의 공격을 그만두라고 요청했다. 잘랄 웃 딘은 이를 수용하였으며, 얼마 후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란으로 이동했다. 이후 과도한 공물 요구에 지친 일부 무슬림 아미르들이 조지아 왕국과 연합하여 그에게 대항하자, 잘랄 웃 딘은 다시 돌아와 1228년 볼니시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재차 패배시켰다.

1230년 쿠타이시에 여전히 머물고 있던 루수단은 수도 트빌리시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몽골군이 조지아로 쳐들어왔다. 잘랄 웃 딘의 연이은 공세로 파탄 지경에 처해있던 조지아군은 몽골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235년 몽골군은 간자를 점령하고 잔혹하게 학살한 뒤 샴코르로 진군해 역시 함락시키고 철저하게 약탈했다. 루수단은 다시 쿠타이시로 달아나면서 트빌리시를 불태우게 했다. 몽골군은 로르, 아니, 뒤마니스, 삼슈빌데를 점령한 후 조지아 영내로 깊숙히 쳐들어가 각지의 요새를 파괴했다. 그 결과 동부 조지아 일대가 몽골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다만 몽골군은 서부 조지아 일대를 공격하려고 리크 산맥을 넘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1239년,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몽골군의 만행을 설명하며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일에 찬성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은 교회를 재결합시키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을 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몽골 제국과 협상하기로 했다. 1242년, 그녀는 신하 아센을 바투 칸에게 보내 협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조지아 동부만 주둔하고 조지아 서부는 그녀가 통치하도록 내버려뒀다. 그 대신, 그녀는 매년 50,000골드의 공물을 바치고 조지아군을 몽골의 보조병으로 보내야 했다.

한편, 그녀는 기오르기 4세의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 7세가 왕위를 갈망할 것을 두려워해 사위인 술탄 카이쿠스로 2세의 궁정에 그를 보내 억류하게 하고, 자신의 아들 다비트 나린을 몽골 궁정으로 보내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게 했다. 그러나 아들이 돌아오지 않던 1245년 사망했고, 귀족들은 2년 더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자 다비트 나린이 사망했다고 여기고 1247년 다비트 7세를 조지아로 불러들인 뒤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살아있었던 다비트 나린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반기를 들었다. 나린의 지지자들은 전통적인 조지아 왕실법에 따라 왕권은 나린에게 속하며 사생아인 다비트 7세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비트 7세의 지지자들은 이에 맞서 기오르기 4세는 다비트 7세를 왕으로 세울 의사가 있었다며 선왕의 유지를 받든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자 양측 모두 몽골에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다. 몽골의 계승법은 적법한 자녀와 사생아를 구별하지 않았다. 귀위크 칸은 이에 의거해 두 사람이 조지아를 동시에 다스리되 나이 많은 사람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지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리하여 다비트 나린과 다비트 7세는 1247년부터 1259년까지 조지아를 함께 통치했다. 그러나 다비트 나린은 1259년 과중한 공물 납부와 몽골의 지나친 간섭으로 민생이 파탄나고 국정 운영에 차질이 생기는 꼴을 보다못해 몽골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일 칸국의 훌라구 칸은 아르군노인에게 대군을 맡겨 그를 토벌하게 했다. 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부 조지아로 후퇴해 쿠타이시를 요새화했다. 아르군노인은 동부 조지아를 장악한 뒤 서부 일대마저 공략하려 했지만, 험준한 산악 지대에 버티고 있는 그를 상대로 고전했다.

1261년 조지아 동부를 다스리던 다비트 7세가 맘루크 왕조를 정벌하려 하니 군대를 보내라는 훌라구 칸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가 몽골군의 침략을 받자 그에게 망명했다. 1262년 다비트 7세가 몽골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조지아 동부로 돌아갔지만, 그는 몽골의 지배를 거부하고 서부 조지아에서 국가를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이리하여 조지아는 몽골의 지배에 순응하는 다비트 7세가 다스리는 동부 조지아 왕국과 몽골의 지배에 끝까지 맞서는 다비트 나린이 다스리는 서부 조지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다비트 나린은 일 칸국의 위협에 맞서 경쟁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1264/1265년 맘루크 왕조에 사절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킵차크 칸국과도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일 칸국 내부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다. 1269년, 그는 바라카 칸과 함께 아바카 칸에 대항했던 테구데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테구데르의 군대가 조지아의 주권을 위협하자, 그는 아바카 칸의 장군 시라문 노얀의 편을 들어 데구데르를 격퇴했다. 그러나 아바카 칸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을 도와줬던 걸 용서하지 않고 1270년대에 그를 징벌하고자 원정군을 두 번 파견했다. 그는 이에 맞서 산악 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몽골군에 상당한 피해를 안겼고, 결국 몽골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1282년 4월, 트라페준타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 있는 틈을 타 트라페준타로 쳐들어가 도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누일 1세의 딸이자 요안니스 2세의 이복 여동생인 테오도라를 후원하여 제위를 찬탈하게 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2세가 1285년 트라페준타로 돌아온 뒤 테오도라를 조지아로 축출하면서, 트라페준타 제국을 조지아의 속국으로 삼으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다비트 7세는 1270년에 사망했고 아들 디미트리오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 칸들에게 충성을 다했고, 일 칸국의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전공을 수차례 세웠다. 그러던 1288년, 아르군 칸의 명령에 따라 카스피해 연안의 다르반트에서 봉기한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일 칸국의 권신 부그하가 반역을 꾀했다가 발각당해 일가족이 처형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부그하의 아들은 그의 딸과 결혼했기에, 아르군 칸은 그도 역모에 가담했을 거라 의심하고 소환 명령을 내렸다. 조지아 총대주교와 조언자들이 소환에 응하지 말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몽골군이 조지아를 침략할 것을 우려해 소환령을 받아들였다. 그는 아르군 칸 앞에 도착한 직후 체포되었고, 1289년 3월 12일 모바칸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유해는 조지아로 이송된 뒤 므츠헤타에 묻혔다. 조지아 정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고 성인으로 시성했다.

아르군 칸은 디미트리오스 2세를 참수한 뒤 다비트 나린의 동의를 얻어 나린의 차남 바크탕 2세를 동부 조지아의 왕으로 세웠다. 바크탕 2세는 재위 3년만인 1292년에 사망했고, 디미트리오스 2세의 아들 다비트 8세가 새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칸의 신임을 얻고자 수도 트빌리시보다 일 칸국의 수도인 타브리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1297년, 바이두 칸과 가잔 칸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바이두 칸을 지지했지만 가잔 칸이 바이두 칸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가잔 칸이 트빌리시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그는 아버지가 소환에 응했다가 어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단호히 거부했다. 가잔 칸은 진노하여 대군을 일으켜 동부 조지아 각지를 초토화시켰고, 몽골군의 지원을 받은 오셰테스는 시다 카르틀리 지방을 공격하여 랴흐비 강 계곡 일대를 정복했다. 그는 미틸레티 산맥에 숨은 뒤 자신을 추격하는 몽골군을 상대로 치카레에서 유격전을 전개한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1299년, 가잔 칸은 그를 조지아 왕으로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의 동생 기오르기 5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일 칸은 여러 원정을 치르면서 조지아군을 이끌 수 있는 성인 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302년에 다비트 8세의 동생 바크탕 3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그는 북부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고 계속 항전했다. 1299년과 1301년, 쿠틀루샤가 이끄는 몽골군이 그를 토벌하려 했으나, 그는 산악 부족의 지원에 힘입어 이들을 격퇴했다. 이에 일 칸국은 협상을 제의하며 가잔 칸의 진영을 방문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같은 꼴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단호히 거부했다.

1304년 트빌리시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지만 곧 몽골군의 지원을 받은 바크탕 3세에게 격퇴되어 산악 지대로 후퇴했다. 이후에도 끈질기게 저항한 끝에, 동부 조지아 대부분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확보했다. 일 칸국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1308년 바크탕 3세가 죽자 그를 조지아 왕으로 인정했다. 그 대신 자신의 아들 기오르기 6세를 몽골로 보내는 데 동의했다. 한편, 그는 일 칸국의 경쟁 국가인 맘루크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1305년 동로마 제국의 중재에 힘입어 예루살렘 십자가 수도원을 조지아 정교회로 복귀시켰다. 1311년 다비트 8세가 사망한 뒤 기오르기 6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렸기에 다비트 8세의 이복 동생이자 그의 삼촌인 기오르기 5세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1313년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을 때 사망했는데, 정황상 기오르기 5세가 암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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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Mikaberidze 2019, 4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