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민생당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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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정당별 결과민생당의 결과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총평[편집]

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최대 패배자가 된 정당을 꼽으라면 바로 민생당을 꼽을 수 있다. 선거 전 민생당의 원내 의석 수는 광주광역시에 5석, 전라남도에 4석, 전라북도에 3석, 비례대표 8석까지 해서 총 20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 이후 호남 지역에 있었던 12석의 의석은 모두 더불어민주당이 가져갔으며 비례대표 역시 정당 득표율이 2.71%에 그쳐 봉쇄 조항인 3% 미만이었기에 단 1석도 획득하지 못하며 결국 원외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번 총선을 통해서 호남 지역 유력 정치인이었던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박지원은 물론이고 호남 지역 최다선이었던 6선의 천정배, 4선의 정동영박주선, 김동철 등 모두 더불어민주당 후보들 앞에서 깨져 나가며 낙선의 고배를 면치 못했다. 지난 20대 총선 때 국민의당의 녹색 돌풍에 힘입어 모두 지역구 수성에 성공했던 관록이 있었던 인물이었는데 이번 총선에선 그 관록이 무색하리만큼 무기력하게 모두 쓸려나갔다. 선거 이전 호남 지역 최다선 의원은 6선의 천정배 의원이었으나 선거 이후엔 3선의 이개호 의원으로 바뀌었을 정도로 대거 물갈이가 되었다. 선거 이전부터 민생당은 호남 이외 지역에선 지역 기반이 약해 '호남 자민련'이란 별칭을 들었던 정당이었는데 이젠 그 호남 지역에서마저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20석 이상의 의석을 가지고 있었던 정당이 순식간에 0석으로 추락하며 소멸한 사례는 거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민생당은 전국 각 지역구에 총 55명의 후보를 내보냈는데[주 1] 이 중에서 당선된 사람은 단 1명도 없으며 선거 비용 전액 보전 기준인 득표율 15%를 넘은 사람도 단 10명에 불과하다. 그 중 9명이 호남 지역에 출마한 후보들이었고 유일하게 경기도 의왕시·과천시 선거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김성제 후보만이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 선거 비용 전액 보전을 받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텃밭이라는 호남에서조차도 무려 6명이나 10%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거 비용을 단 한 푼도 보전받지 못했다. 전국을 통틀어 민생당 후보 중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사람이 전라남도 목포시에 출마했다 낙선한 박지원 후보인데 그조차도 37.34% 득표에 그쳐 득표율 40%도 넘기지 못했다. 박지원 의원은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된 이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목포에서 내리 3선을 기록한 인물로 별명이 '목포의 왕'이었다. 그런 그조차도 40%도 못 넘기고 낙선했으니 호남에서조차도 얼마나 민생당 후보들이 경쟁력이 없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원외 정당으로 전락한 민생당은 이제 존립 위기에 놓였다. 물론 이번에 원외 정당으로 전락했다고 하더라도 재기에 성공하지 말란 법은 없다지만 현재 민생당은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물이 없는 상태이다. 우선 민생당의 대표적인 구성원들은 평균연령이 높은 편이다. 게다가 미래권력으로 키워볼 유망주도 없으며, 미래권력에 가장 가까운 정치인도 없는 상태이다. 호남을 기반으로 다시 일어나기엔 이미 더불어민주당에 누구보다도 확실한 호남 지역 대권 주자인 이낙연이 건재하다.[1] 그렇기 때문에 2년 후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까지 민생당이란 정당이 아직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그 당에서 내보낼 수 있을 만한 대권 주자가 없는 상태이다. 민생당 소속 정치인 중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박지원, 천정배, 정동영 인데 박지원은 그 때 쯤이면 벌써 만 80세의 고령이다. 정동영은 이미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에게 531만 표 차로 대패를 당한 바 있으며 결정적으로 호남 이외의 지역에 출마해서 단 1번도 당선된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나마 천정배가 대선 때엔 만 68세로 대선에 내보낼 만한 인물이지만 그 역시 이미 6선이나 지낸 구세대 정치인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하고 대권 주자로 내보낼 만한 변변한 인물이 없다는 것도 민생당의 고민이다.

민생당으로서 최선의 시나리오는 더불어민주당과 합당하는 것일 터인데 그것도 이마저도 쉽지 않다. 우선 민생당은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당시 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항상 비판을 일삼던 호남계와 안철수계가 탈당하여 창당한 국민의당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국민의당이 갈라져 나간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큰 계파 갈등 없이 조용히 순항하고 있으며 전국 단위 선거에서 4연승을 기록할 정도로 민주 정당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 상황에서 민생당과 합당하는 것은 우선 당 내 지분이 큰 친문계에서 반발할 가능성이 높고 민생당과 합당을 했을 때 원내 의석 수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미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무소속이나 다른 당으로 출마했다가 우리 당으로 복당을 시도할 경우 복당을 불허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이고 실제 일부 민생당 소속 정치인들이 더불어시민당을 통해 우회 복당을 추진했다가 적발되어 모두 가차없이 쫓아냈다고 한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탈당을 했으면 자숙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데 정치적 노림수나 계산에 의해 수퍼 여당인 민주당에 복당을 신청한 것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면서 “이번 기회에 복당 규정을 강화해 철새 정치인을 양산하는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2]

총선에서 모든 의석을 잃었기에 민생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아직은 호남 지역에 민생당 기초자치단체장이 3명이 남아 있고 지방의회에도 광역의원 7명, 기초의원 32명이 남아 있지만 그들도 다음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는 상태이다. 당의 존폐 위기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강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패배 요인[편집]

민생당은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 비례대표 모두 단 1석도 얻지 못하며 원외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텃밭이었던 호남에서조차도 당선은커녕 득표율 40% 이상을 기록한 사람도 단 1명도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민생당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게 된 원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당 외부 요인[편집]

국민의당의 녹색 돌풍 동력 상실[편집]

먼저 이 민생당이란 정당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이었던 2015년 말에 당시 당 대표였던 문재인을 중심으로 한 친노-친문계와 안철수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비문계 간 계파 갈등이 극에 달했다. 안철수를 대표로 한 비문계는 사사건건 '친노 계파 패권주의' 운운하면서 갈등을 유발했다.[3] 총선을 앞두고 당시 문재인 대표는 자신과 안철수,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이 3명을 중심으로 연대를 구축하는 이른바 '문-안-박' 연대를 안철수에게 제안했지만 안철수는 그것마저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문재인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며 혁신 전당대회를 개최해 당 지도부를 새로 뽑아야 한다는 소리만 해댔다.[4] 문재인과 안철수 두 사람의 핑퐁 게임으로 인해 당 내외에선 소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패러디해 '화성에서 온 재인, 금성에서 온 철수'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결국 문재인 대표부를 흔들다가 지친 안철수는 제가 먼저 2015년 12월 13일에 전격 탈당을 선언하였다.[5] 뒤이어 안철수를 따라 호남계들도 줄줄이 탈당을 하며 당이 분당되었다. 이렇게 갈라져 나간 이들이 국민의당을 창당했고 잔류한 자들은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고쳤다.

호남계와 안철수계는 서로 이질적인 집단이었지만 두 세력의 절묘한 조화 덕분에 제 3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세련된 정치력은 부족하나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새정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안철수, 그리고 이미 연배도 상당히 높고 정치 경력도 너무 오래되어 참신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졌으나 10~20여 년간 민주당계 정당에서 벌어진 계파 갈등으로 다져진 정치 기술을 보유한 호남 정치인들이 서로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잘 메꿀 수 있는 여건이 절묘하게 마련되어 있었고, 양자의 목표가 타도 문재인으로 같은 방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호남 정치인들이 호남홀대론으로 비노 정서를 자극하며 지역구 의석을 벌어오면서 안철수는 중도 세력의 희망이라는 점을 강하게 어필하며 비례대표 의석을 벌어오는 보기 드문 조화를 이루며 2016년의 국민의당은 20대 총선에서 제 3당으로 국회의 캐스팅보트를 자처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랐다. 물론 지역구에선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안철수관악구 갑김성식 단 2명을 빼면 모두 호남에서만 지역구 당선자를 냈고 나머지 지역에선 죄다 표 분산만 일으켜 새누리당 좋은 일을 시켜주긴 했지만 말이다.[6][7][8][9] 호남에서 이렇게 국민의당을 밀어주었던 것은 다당제의 질서에 걸맞게 캐스팅보트로서 목소리를 내며 그간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호남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주길 바랐던 호남도민들의 심리도 한몫했다.

그러나 안철수는 생각보다 정치적으로 굉장히 미숙한 인물이었고 호남계 정치인들은 생각보다 훨씬 닳고 닳은 구태들이었다. 2016년 당시 김수민·박선숙 리베이트 사건 때 안철수가 미숙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 때부터 서서히 국민의당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높아졌다. 그 당시 안철수를 비롯한 국민의당 지도부는 초기에 "당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모르쇠로 일관했고, 실효성 없는 자체 진상조사단의 성급한 결과 발표로 논란을 야기했으며 단호한 조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 식구를 감싸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만 보였다.[10] 그리고 이후 그 해 10월에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에도 국민의당은 다소 계산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점점 호남에서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안철수가 정치적으로 미숙한 모습을 보이며[11] 결국 민주 정당의 텃밭인 호남에서 28.1% : 62%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2배 이상의 격차로 대패하면서 호남에서 국민의당 지지율은 한 자리 수%로 추락하였다.[12] 거기다 대선 이후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호남 전역에서 국민의당 지지율이 자유한국당보다도 뒤처지며 빠르게 꺼져 갔다.[13] 문재인 정부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내각과 청와대 주요 인사에 호남 출신 인물들을 등용하면서 호남 껴안기에 나섰고 결국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호남에서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그런 와중에 국민의당은 과거 민주당계 정당의 고질병이었던 계파 갈등으로 몸살을 앓게 되었다. 새로이 당 대표에 취임한 안철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비난을 퍼부어대며 지지층 결집을 시도했지만 계속해서 국민의당 지지율은 한 자리 수%에서 정체되어 치고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안철수는 정치적 무리수라 할 수 있는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거론했고 이에 호남계가 반발하면서 호남계와 안철수계가 대립하게 되었다.[14][주 2] 결국 2018년 초에 국민의당은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같은 해 열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은 광주에서 더불어민주당에 대참패를 당하며 박살이 났고 같은 날 치러진 2018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송기석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광주 서구 갑 지역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송갑석 후보가 당선되었고 박준영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전남 영암군·무안군·신안군에서도 역시 더불어민주당 서삼석 후보가 당선되며 더불어민주당은 2년 만에 다시 광주에 입성하는데 성공했고 전남의 의석도 2석으로 늘리는데 성공했다. 이 선거는 이번 총선의 예고편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은 선거 이후에도 계파 갈등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자중지란만 일으켰다. 먼저 구 국민의당 호남계가 주축이 되어 갈라져 나간 민주평화당은 2019년에 들어서 박지원, 천정배 등을 중심으로 한 광주-전남파와 정동영을 중심으로 한 전북파로 또 갈라져 싸움을 일삼았고 결국 광주-전남파는 민주평화당에서 또 갈라져 나와 대안신당이란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구 국민의당 안철수계가 주축이 되어 바른정당과 합당해 차린 바른미래당에서도 손학규계와 유승민계가 갈라져 싸우면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결국 구 바른정당 식구들은 일부는 자유한국당에 백기 투항하듯이 복당했고 일부는 새로운보수당이란 정당을 창당해 갈라져 나갔다가 자유한국당과 합당하여 미래통합당에 합류했다. 그 과정에서 안철수계 인사들도 상당수 미래통합당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안철수계 나머지 인사들도 안철수를 따라 탈당해 신 국민의당을 차려 바른미래당은 손학규계만 남게 되었다. 총선을 앞두고 결국 민주평화당과 대안신당, 바른미래당 이 3당은 다시 힘을 합치자는 뜻을 모아 민생당이란 정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이미 4년 동안 국민들은 이 당에서 일어난 숱한 계파 갈등과 이로 인한 이합집산의 연속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 사이 지난 20대 총선 때 획득했던 호남의 지지여론은 더불어민주당이 가져간 뒤였고 결국 호남 전 지역은 다시 더불어민주당이 휩쓸었으며 수도권까지 더불어민주당이 휩쓸면서 지역구에서 163석이나 얻으며 지역구 의석만으로 단독 과반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정당 내부 요인[편집]

끊임 없는 계파 갈등으로 인한 이합집산의 반복[편집]

더불어민주당 이전 민주 정당은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계파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일찍이 1980년대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상도동계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동교동계 간 계파 갈등으로 인해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으로 분당된 것부터가 민주 정당 계파 갈등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 결말은 파멸이었는데 28년 만에 실시된 사실상의 첫 직선제 대선이었던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 후보가 서로 표 분산을 일으킨 탓에 민주정의당노태우가 불과 36.6%밖에 안 되는 득표율로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덕분에 2020년까지도 노태우의 득표율이 역대 대선 당선자 중 최저 득표율로 남아 있다. 양김 후보의 득표율 합이 55%로 노태우의 득표율을 아득히 초과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민주 정당의 계파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결말을 초래했는지 알 수 있다. 노태우의 당선은 사실상 군사정권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상도동계 중심의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더불어 3당 합당을 거쳐 민주자유당이라는 보수 정당의 일원이 되었고 현 민주 정당은 동교동계 민주당의 후신들이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이후 당내 비주류인 영남 출신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호남 출신인 동교동계와 비호남 출신인 친노 세력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고 결국 이로 인해 새천년민주당에서 친노 계파 중심의 열린우리당이 떨어져 나갔다. 이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이합집산을 벌여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고 난 이후로 다시 한 집안 두 식구가 되면서 계파 갈등이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했다. 이 계파 갈등이 정점에 달했던 것이 바로 새정치민주연합이었다. 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문재인 대표를 중심으로 한 친노계와 안철수계, 동교동계, 손학규계가 합쳐진 비노계로 갈라져 하루가 멀다하고 분열의 모습이 터져 나왔으며 그 덕분에 2015년까지 지방선거는 물론이고 재보궐선거까지 선거를 치르는 족족 모두 패배를 당했을 정도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분당되었는데 여기서 두 당의 운명이 엇갈렸다.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뭉쳐서 비교적 큰 계파 갈등 없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국민의당은 계파 갈등의 늪에 빠졌다. 그로 인해 국민의당이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으로 갈라졌고 그 바른미래당은 또 새로운보수당과 바른미래당으로 분열되었고 민주평화당 역시 대안신당과 민주평화당으로 분열되었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이전 민주 계열 정당이 누구보다 잘 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평소에는 서로 원수 같이 으르렁거리며 피비린내 나는 계파 간 혈전을 벌이다가도 선거 때만 다가오면 갑자기 서로 간의 증오와 원한을 훌훌 털어버린 척 손을 맞잡고 의기투합해서 '민주'와 '통합'이니 하는 단어가 들어간 새로운 정당을 창당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급조하듯 창당된 대통합민주신당,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급조하듯 창당된 통합민주당,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급조하듯 창당된 민주통합당 등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은 김한길을 중심으로 한 비노계가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만든 중도통합민주당, 기존 동교동계 중심인 새천년민주당과 친노 세력들만 남은 열린우리당이 17대 대선을 앞두고 부랴부랴 합당해서 만든 정당이었고 통합민주당은 18대 총선을 앞두고 그 대통합민주신당에 김한길이 창당했다가 파투냈던 중도통합민주당 내 잔류파가 만든 민주당이 합당해서 부랴부랴 창당한 것이었다. 민주통합당 역시 민주당에 진보성향의 시민단체 인사와 친노계 인사가 주축이 되어 만든 시민통합당이 19대 총선을 앞두고 급조한 정당이었다. 물론 이렇게 급조한 정당들로 치른 선거에서 이긴 적은 단 1번도 없었다.

이 민생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민주평화당과 대안신당 그리고 손학규계만 남아 빈 껍데기로 전락한 바른미래당이 갑자기 의기투합하여 급조한 정당이었다. 본래 이 정당의 이름은 '민주통합당'이 될 예정이었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정당법 41조 유사명칭 사용금지 조항에 따라 민주통합당이라는 당명은 사용할 수 없다"고 사용을 불허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쓰게 된 것이었다.[15] 어쨌든 이 민생당이란 정당은 누가 봐도 선거를 위한 일시적 야합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는 서로 웃으면서 악수하고 같이 사진 찍는 쇼를 했다지만 이미 한 번 서로 심하게 싸우고 갈라졌던 자들이 진정으로 다시 합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거라는 '대의'를 앞두고 의기투합을 한다고 해서 계파 갈등이 멈출 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합당한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바로 계파 갈등이 터져 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이 비례연합정당인 더불어시민당 창당을 두고 민생당 측에 참여를 제안했는데 여기서 바로 계파 갈등이 촉발된 것이다.[16] 대안신당계인 장정숙 원내대표와 민주평화당박주현 공동대표는 비례연합정당 참여에 찬성했지만 바른미래당계인 김정화 공동대표가 완강히 반대하는 바람에 갈등이 터져 나온 것이다. 심지어 이 때문에 몸싸움까지 벌이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17] 그런데다 처음 더불어민주당 측에서 비례연합정당 참여를 제안했을 때 윤호중 사무총장이 직접 친서를 전달하러 왔는데 김정화 공동대표가 "왜 스팸메일을 가져오는지 모르겠다."며 당 대표의 친서를 스팸메일로 비하하는 짓까지 저질렀다고 한다.[18]

결국 3월 20일에 민생당은 비례연합정당에 불참하기로 하면서 1차 갈등은 봉합되는 듯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주곡에 불과했다. 24일엔 정동영민주평화당 대표가 24일 바른미래당계 중심의 반호남주의 노선이 폐기되지 않으면 중대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최후통첩을 날리며 김정화 대표의 사퇴를 촉구하였고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민주평화당은 합당을 철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19] 그리고 26일에 비례대표 후보 순번을 배정하는 것에서 또 계파 갈등이 터지고 말았다. 비례대표 명단이 알려진 12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7명이 구 바른미래당계였기 때문이었다. 민생당에서는 당 공관위원 9명 가운데 5명이 바른미래당계로 구성되는 등 이들이 당 운영의 주도권을 쥐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당내 대안신당민주평화당계에서는 비례 명단을 두고 "굴욕적"이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특히 '백의종군'을 하겠다던 손학규 구 바른미래당 대표가 당선권인 비례대표 2번을 배정받은 게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당내 내분이 점점 격화되어갔다.[20] 당시 민생당의 지지율은 리얼미터 기준으론 1.8%였고[21] 한국갤럽 기준으론 0%였다.[22] 이렇게 한 줌도 안 되는 지지율을 가지고 서로 안에서 갈라져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3월 27일 안병원 공관위원장을 해임하고 민주평화당 출신 김명삼 신임 공관위원장을 임명하며 손학규계가 화해 제스처를 내밀어 간신히 갈등을 봉합하는 등, 당장에 이번 총선이 민생당에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민주평화당이 했던 것처럼 당이 하나되어 호남에 상주해도 어려운 선거인데도 불구하고 총선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도 계파 갈등과 공천 관련에 이권 다툼에 골몰했었다. 계파끼리 피터지게 싸운 끝에 만든 공천을 납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투표지 1번을 찍지 못해 울면서 겨자먹기로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던 불쌍한 유권자들에 의해 최소 제2당이 보장되던 시대는 이미 지났음에도, 민생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여전히 그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전국의 유권자들은 과거 민주 정당의 고질병이었던 계파 갈등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누구인지를 훤히 알게 되었다. 선 계파갈등 후 졸속야합의 주동자들이 현 더불어민주당보다는 민생당에 몰려 있음을 삼척동자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점은 결국 유권자들로 하여금 민생당이란 정당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뺄셈 통합[편집]

앞서 말했듯이 민생당은 선거를 앞두고 민주평화당대안신당 그리고 손학규계만 남은 바른미래당 이 3당이 합당하여 만든 정당이었다. 물론 앞서 보았듯이 졸속 야합에 가까운 물리적 결합에 불과했지만 이 물리적 결합마저도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바른미래당은 국민의당 내 안철수계와 바른정당이 합당해서 세운 정당이었는데 잇단 선거에서의 패배와 손학규 대표 체제의 불만으로 인해 구 바른정당 출신들은 이미 새로운보수당으로 갈라져 나갔고 이들은 자유한국당과 합당해 미래통합당이 되었다. 그리고 안철수 또한 권은희 등 몇 명의 측근들과 함께 탈당하여 신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른미래당의 비례대표들이었다. 공직선거법 상 비례대표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탈당하면 그 즉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반드시 소속 정당에서 출당, 제명시켜주어야만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구 바른정당 출신 소속 의원 8명이 새로운보수당으로 갈라져 나간 이후 바른미래당 소속 국회의원은 총 17명이었는데 이 중 13명이 비례대표였다. 이 13명의 비례대표 의원들 중 김삼화, 김수민, 김중로, 신용현, 이동섭, 이상돈, 이태규, 임재훈, 최도자까지 총 9명은 제명을 요구했으나 손학규가 이를 거부하면서 당 내 내분이 격화되어 있었다. 결국 이 9명의 비례대표들은 희대의 코미디를 벌였는데 바로 자체적으로 의원 총회를 열고 스스로 제명을 강행하는 이른바 '셀프 제명'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23] 그리고 이렇게 셀프 제명을 강행한 9명 중 김삼화, 김수민, 김중로, 신용현, 이동섭, 임재훈미래통합당으로 갔고 이태규는 신 국민의당으로 갔으며 이상돈은 무소속으로 남았다. 그리고 최도자는 다시 탈당을 취소하며 당에 잔류했다.

본래라면 민생당은 29석이 되었을 정당이었지만 이렇게 8명이 셀프 제명을 하며 당을 나간 탓에 결국 뺄셈 통합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쨌든 셀프 제명 사건이 있고 이틀 후에 민생당이 출범했는데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셀프 제명 사건에 대해 손학규 구 바른미래당 대표는 법원에 제명절차 취소 가처분 신청을 했는데 3월 16일에 법원이 그걸 인용하면서 결국 셀프 제명하며 바른미래당을 박차고 나갔던 그 8명의 비례대표들은 모조리 민생당 소속으로 원위치되어버린 것이다.[24] 이 8명 중 김삼화, 김수민, 김중로, 신용현, 이동섭은 이미 미래통합당의 공천까지 받아놓은 상황이었는데 셀프 제명이 무효가 되어 모두 강제로 민생당으로 복당하게 되었기에 공천이 무효가 될 판이었다. 결국 3월 18일에 이 5명 중 경선을 치러 공천을 받은 신용현은 경선이 무효가 되었고 민생당에 잔류하게 되었다. 나머지 4명은 단수 공천을 받았기에 다시 민생당을 탈당하고 의원직을 상실한 상태로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이상돈과 신용현, 임재훈 이 3명은 민생당에 잔류했고 이태규는 탈당해서 신 국민의당으로 합류했다.[25] 이런 한 편의 웃지 못할 3류 정치 코미디에 국민들은 더더욱 민생당이란 정당에 학을 떼고 말았다.

그 뿐 아니라 민생당은 기존 식구들까지도 제대로 아우르지 못했다. 2019년 8월에 김경진, 이용주, 정인화 의원이 민주평화당을 탈당했고 이들은 민생당으로 합류하지도 않고 무소속으로 남았다. 민생당이 출범한 이후에도 2월 5일에 김관영 의원이 탈당했다. 3월 2일엔 지난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민주평화당 당적으로 전라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임정엽 후보가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며 또 3월 9일에 김종회 의원이 탈당하며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이렇게 민생당은 기존 대안신당, 민주평화당, 바른미래당 식구들조차 온전히 다 포섭하지 못한 채 통합을 강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탈당자들은 당선되면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선거에 임하며 민생당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화학적 결합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물리적 결합도 어설프게 이루어진 상태로 선거에 나섰으니 당연히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미래통합당이 계파 갈등으로 모래알 조직력이 된 채 선거를 치렀듯이 민생당 또한 모래알 조직력이었던 것이다.

통일된 선거 전략 부재[편집]

지난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호남에서 녹색 돌풍을 일으킬 때엔 참여정부의 '호남홀대론'으로 크게 재미를 보았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선 민생당은 4년 전에 재미를 보았던 호남홀대론을 절대 써먹을 수가 없었다. 과거 전라남도지사를 지낸 이낙연국무총리로 영전되었을 뿐 아니라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를 역임했고 아울러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확고부동의 유력 대권주자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낙연은 더불어민주당 내 친문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주 3] 그런데 어떻게 호남홀대론을 써먹을 수 있겠는가? 바른미래연구원(현 혁신과미래연구원)에서는 이념좌표는 ‘중도-중도진보’이지만 포지션은 확실한 야당으로 거듭나 여당을 대신할 중도-진보적 대안 정당으로 거듭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따라서 민생당은 사실상 통일된 선거 전략 없이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유권자들의 민심 이반을 직접 느낀 민생당 소속 의원들은 급기야 부랴부랴 전략을 짜냈는데 그것은 바로 '호남 대통령' 만들기였다.[26] 그런데 그 호남 대통령으로 만들 인물은 민생당 소속이 아닌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이낙연 전 총리였다. 대표적인 예로, 김동철 의원은 자신이 '이낙연과 50년 막역지기'라는 점이 세일즈 포인트이고,[27] 천정배 의원의 구호는 "호남 대통령을 만들겠습니다."였다.[28] 자체 경쟁력이 너무나도 없는 나머지 라이벌 당의 대권주자의 인기에 얹혀가기를 선택한, 역사에 남을 해괴한 전략이었다. 이런 해괴한 전략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권자들 입장에선 이낙연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왜 민생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이낙연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면 그가 속한 더불어민주당을 찍어주는 게 옳지 엉뚱한 민생당을 찍어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더불어민주당은 민생당을 향해 "기생충이냐?"는 날선 비판까지 냈을 정도였다.[27]

그 밖에 전북 지역 후보들은 견제론을 들고 나왔다. 전북 지역의 민생당 대표 선수 정동영 후보는 "더불어민주당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 운영을 위해 자신들을 찍어달라'고 하는데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민주당의 호남 싹쓸이는 문 대통령에게 독(毒)이고, 전주 지역 발전에도 독이 될 겁니다."라며 민생당을 찍어주는 것이 곧 호남 발전을 돕는 길이며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을 돕는 길이라는 이른바 견제론을 내세우며 유권자들의 표심 돌리기에 집중했다.[29] 하지만 이런 견제론이 전북도민들에게 제대로 어필이 될 리가 없었다. 애당초 민생당 후보들은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당시 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과 척을 지고 내부 분란을 일으키다 안철수를 따라 나간 사람들인데 어째서 민생당을 찍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을 돕는 길이란 것인지 문재인 대통령을 돕는데 왜 굳이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민생당을 찍어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을 시켜주지도 못했고 민생당이 더불어민주당보다 더 유능한 정당이란 것도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애초부터 세 식구가 졸속으로 야합을 했기에 원팀으로 뭉쳐있지도 못했고 통일된 선거 전략을 내놓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엄연히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이낙연 전 총리에게 기대는 모습을 보였단 것은 결국 그만큼 민생당에서 차기 대권주자로 내보낼 만한 인물이 전혀 없었다는 뜻도 된다. 그만큼 이 당은 미래 권력도 부재했던 것이다.

지지층 결집 실패[편집]

민생당 소속 의원들은 대부분 호남 지역 다선 의원이었기에 지지 기반은 당연히 호남에 있었다. 과거 자민련이 흥성했던 이유는 대전광역시충청남도라는 확실한 지역 기반이 있었기에[주 4] 그곳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종국에 무너지게 된 이유도 지역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일단 텃밭이 건재하면 향후 그것을 바탕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의 민생당은 그 텃밭이었던 호남도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했다. 사실 민생당 이전의 민주평화당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전라남도지사, 전라북도지사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영록 후보와 송하진 후보에게 압도적인 격차로 패배하였고 겨우 기초자치단체장 5석을 획득하는데 그친 것에서 이미 호남 지역에서도 상당수 이탈했다는 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 2년 사이에 민주평화당은 계파 갈등 끝에 대안신당과 민주평화당으로 갈라졌고 뒤늦게 총선 직전에 부랴부랴 합당했지만 그걸로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친문 패권주의 견제' 및 '호남 정치 복원'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이라도 있었던 지난 20대 총선과 달리 이번엔 호남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한 명분도 없었다. 그리하여 민생당 소속 후보들은 단 1명도 4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오히려 이전에 일찌감치 민생당을 탈당하고 무소속 출마를 강행한 후보들의 득표율이 더 높았다. 광주광역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경진 후보는 37.6%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그곳에 출마한 민생당 소속 후보들 중 그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 6선의 관록이 있는 천정배조차도 20%도 올리지 못하며 체면을 구겼고 4선의 박주선김동철은 선거비용 전액 보전 기준인 15% 득표도 못 올리는 망신을 당했다. 심지어 이번 총선에 출마한 민생당 후보들 중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사람이 목포시에 출마한 박지원 후보인데 그의 득표율은 37.3%로 김경진 후보보다 더 낮았다. 즉, 광주는 물론이고 전남, 전북에서도 김경진 후보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민생당 후보는 단 1명도 없다는 뜻이다. 전라북도에서도 지역의 이름난 정치인인 정동영은 32%, 유성엽은 30.3% 득표에 그쳤으며 전북 지역 유명 여성 정치인인 조배숙은 15.8%로 선거비용 전액 보전만 겨우 성공했다. 오히려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관영이 36.7%, 임정엽이 38.6% 득표율로 상대적으로 더 높았다. 이용호의 경우는 상대가 여러 논란거리에 휘말렸던 이강래였다는 점에 힘입어 아예 승리하고 당선되기까지 했다. 그만큼 얼마나 민생당이란 정당이 호남에서조차도 버림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향후 과제[편집]

지역구, 비례대표를 통틀어 단 1석도 얻지 못했기에 민생당은 이제 당이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을 재건하는 것이 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다. 비록 원내에 의석은 단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민생당 소속 기초자치단체장이 3명이 있고 지방의회에 소수의 소속 의원들이 남아 있으므로 다른 원외 정당들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도 생존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방의회에라도 소속 의원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가용할 수 있는 지방 조직이 남아 있다는 걸 뜻하는 것이므로 이들을 기반으로 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이 현재 민생당은 당 재건의 책임을 짊어질 만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민생당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대체로 연배가 매우 높고 호남 이외의 지역에는 사실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기에 그러하다. 미래의 권력을 제대로 육성하지 못한 것이 현재 민생당에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자생이 어렵다면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난 형제인 더불어민주당에 흡수 통합되는 것이 상책이고 현재 민생당에서 바라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시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당 내 주류인 친문계의 반발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친문계는 현 민생당의 주요 구성원들이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에 했던 짓을 고스란히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민생당과의 합당을 바랄 리가 없고 무엇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 의석만으로도 단독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슈퍼 여당이기에 민생당과 합당을 해야할 만큼 세력이 궁한 처지가 전혀 아니다. 원내 의석도 모두 없어진 탓에 더불어민주당이 민생당과 합당했을 때 얻을 만한 실익 자체가 없다. 굳이 하나 찾자면 막강한 자금력 정도밖에 없다. 실제로 민생당은 합당 과정에서 국민의당바른정당의 재산을 모두 독차지한데다 20대 국회까지는 엄연히 20석의 의석을 확보해 단독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당이고 선거운동에도 큰 돈을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금력은 막강하다. 2020년에는 선거 때문에 추가로 국고보조금을 더 받아서 자산이 최소 100억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30] 게다가 2020년 5월 15일까지는 아직 20대 국회이기 때문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국고보조금을 16억 2,600만원을 또 받았다. 그렇기에 민생당은 당 규모에 비해 굉장히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는 정치적 실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데 민생당의 돈이 탐난다고 정치적 실익이 없는 민생당과의 합당을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려 할지는 미지수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현재 무소속인 이용호 의원을 복당시켜서 다시 원내 정당으로 올라서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용호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입당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지만 이미 2차례 입당 심사에서 퇴짜를 맞은 바 있고 이번에도 이해찬 대표가 직접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자들이나 다른 정당 출신 당선자들의 복당 및 입당을 불허한다."고 못을 박았기에 사실상 더불어민주당 입당이 무산된 상태이다. 기본적으로 무소속 의원은 의정 활동에 제약이 많기 때문에 이용호 의원에게 구애를 보내 입당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그 점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우선 당 내 계파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다. 자강론으로 가든 더불어민주당과 합당을 하든 우선 당 내 잡음이 발생하는 일을 최대한으로 줄여야 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과거 민주 정당이 암흑기에 빠졌던 것도 이 계파 갈등이었고 더불어민주당은 이 계파 갈등을 어떻게든 봉합하기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다. 민생당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선거 이후에 김정화 대표가 물러난 이후 비상대책위원장 자리를 놓고 또 계파 갈등이 발생하고 있어 당 재건의 길은 앞으로도 요원하기만 하다.[31]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1. 서울 : 10명, 부산 : 4명, 대구 : 2명, 광주 : 7명, 울산 : 2명, 세종 : 1명, 경기 : 7명, 강원 : 1명, 충북 : 3명, 충남 : 2명, 전북 : 6명, 전남 : 6명, 경북 : 1명, 경남 : 3명
  2. 이 무렵에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취소하려고 공작을 넣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따르는 동교동계 중심의 호남파 의원들은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더욱더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문재인 정부의 모토였던 적폐청산에 국민의당 역시 동참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하루가 멀다하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비난만 퍼붓고 있었기에 도무지 화합할 수가 없었다.
  3. 엄밀히 말하면 이낙연은 본래 비문(非文)계 출신이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국무총리 직을 훌륭히 수행했기에 친문으로 받아들여졌다. 친문이란 계파가 문재인 대통령이 정계 입문을 늦게 했고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즘에야 비로소 갖추어졌기 때문에 다른 계파에 비해서 출신 성분을 엄격하게 안 따지는 편이다. 2016년까지만 해도 문재인 대통령은 '친노의 수장' 정도로만 인식되었지 친문이란 계파가 언급되진 않았다.
  4. 자민련은 충청 지역정당이었지만 의외로 충청북도에선 그 세가 약한 편이었다.

참고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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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영석 (2015년 10월 11일). "전투는 바깥에서 벌어졌는데 내부로 총질", 안철수 공격에 문재인측 부글부글”.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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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한국갤럽 2020년 3월 4주 차 여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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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김미경 (2020년 3월 16일). “바른미래당 셀프제명 무효..탈당 비례대표 8명 다시 민생당으로”. 《디지털타임스》. 
  25. 박정환 (2020년 3월 18일). “바른미래 '셀프제명' 의원 뿔뿔이..불출마·의원직 상실”. 《노컷뉴스》. 
  26. 류성호 (2020년 4월 7일). “박주선·김동철·장병완·황주홍 "호남대통령 만들 것". 《KBS》. 
  27. 김경은 (2020년 3월 26일). “민생당 김동철, 이낙연 내세워 선거운동.. 민주당 "기생 정치". 《머니S》. 
  28. 한산 (2020년 4월 13일). “천정배 '호남 대통령 만들겠다'. 《뉴스 1》. 
  29. 주형식 (2020년 4월 3일). “[4·15 핫플] 정동영 "호남 싹쓸이, 文정부에 독 될 것". 《조선일보》. 
  30. 송희 (2020년 4월 21일). “[이슈] 당선자 0명 민생당, 자산은 최소 100억 원대…국민의당과 통합설 고개 들어”. 《폴리뉴스》. 
  31. 윤명진 (2020년 5월 6일). “당선인 '0명' 민생당.. 비대위원장 놓고 또 계파갈등”.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