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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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호
출생1930년 4월 15일(1930-04-15)
일제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남원
사망2008년 11월 12일(2008-11-12)(78세)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
직업대학교수,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

박춘호(朴椿浩, 1930년 4월 15일2008년 11월 12일)는 한국의 대학교수, 국제법학자로 해양법 관련 국제기구에서 폭넓게 활약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帶江面)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영국과 미국에서 국제법과 해양법, 에너지법 등을 연구하고 주목할 만한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으며, 1996년 임기 9년의 국제연합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95년까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90년대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북경대 객원교수와 1995년에는 일본 세이난 가쿠인 대학(西南学院大学) 법학부 교수를 지냈다.[1]

생애[편집]

유년기와 청년기[편집]

전라도 지리산록의 벽촌인 평촌리(坪村里)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가난 속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해방 후 순창(淳昌)농림중학교(현 순창제일고등학교)를 다녔으며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그해 한국전쟁이 발발해 휴학하였다.

군에 입대하여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통역장교로 복무하였다. 당시 미군의 전쟁고아 복지사업을 지원하면서 거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편집]

1955년 전역 후 서울대 정치학과에 1학년으로 복학하여 1959년에 졸업하였다. 그의 영어실력이 뛰어난 덕에 문교부(현 교육부) 영어담당 편수관으로 특채되어 근무하다가 1965년과 1966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언어학석사와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2]

그의 회고록[3]에 따르면, 초등학교 시절 산골 소년이 여수의 친척 집에 갔다가 남해 바다를 보고 바다를 동경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돌아다니는 꿈을 품고 내성적인 성격을 스스로 변화시키는 한편 세계 각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마도르스가 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해 이를 단념하고 대신 열심히 공부해서 바다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문교부 편수관을 사직하고 노모 등 다섯 식구를 셋집에 남겨둔 채 두 번째 영국유학길에 올랐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하루 4시간만 자고 도서관에서 오직 연구에만 전념한 끝에 1971년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국익증진 차원에서 석유메이저 ‘걸프 경계론’을 제기하였다가 석유메이저와 정부당국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국내에서 활동의 제약을 느낀 그는 1972년 세 번째 유학길에 올라 캐나다 토론토대와 미국 하버드대 동아시아 법률연구소에서 8년간 해양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미국 해양법연구소[4](the Law of the Sea Institute: LOSI)의 집행이사를 맡았으며, 〈해양정책(Marine Policy)〉, 〈해양개발과 국제법(Ocean Development and International Law)〉등 국제학술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국제법학자로서의 활동[편집]

1982년 귀국한 박춘호는 고려대학교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던 중 1986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1995년까지 국제법을 강의하였다.[5]

1996년에는 국제해양법재판소(International Tribunal for the Law of the Sea: ITLOS, 독일 함부르크 소재)의 21명의 초대 재판관 선거에서 제1차로 압도적 다수표를 얻어 9년 임기의 재판관으로 선출되었으며, 2005년 재선되었다.[6]

1997년 고려대 국제대학원의 석좌교수로 위촉되었고 세계국제법학술원(Institut de Droit International) 제68차 총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회원에 당선되었다.

2007년부터 2008년 별세할 때까지 세계국제법협회(International Law Association: ILA) 한국본부 본부장을 지냈다.

저서 및 상훈[편집]

저서[편집]

  • 《지해문집(之海文集) IㆍII》 (회갑기념눈문집), 박춘호박사 문집 간행위원회, 1990.07.
  • East Asia and the Law of the Sea, 서울대 출판부, 2000.[7]
  • 《지리산골에서 세계의 바다에서》 (자전적 에세이) 문학사상사, 1998.09.[8]
  • 국제법 해양법 에너지법에 관한 영문 저서 및 편저, 논문 다수

상훈[편집]

  • 1989 학술원상 (사회과학 부문)
  • 1994 대한국제법학회 현민(玄民) 학술상
  • 1997 제22회 전북대상 (전북일보)
  • 2001 '바다의 날' 금탑산업훈장
  • 2006 제37회 한국법률문화상 (대한변호사협회)[9]

각주[편집]

  1.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2020.12.13 최종 접속.
  2. 박춘호는 영어ㆍ일어는 모국어 수준으로 유창하고, 중국어ㆍ독어ㆍ불어는 전공 때문에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러시아어와 베트남어도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한국경제신문, “박춘호 교수. 국제법학술원 정회원 당선", 1997.09.19. 2020.12.13 최종 접속.
  3. 박춘호, 《지리산골에서 세계의 바다에서》, 문학사상사 1998.
  4. 정부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포함해 각국에서 진행 중이거나 앞으로 있을 영토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국가해양법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이다. 해양수산부는 기존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에 속한 해양정책연구소를 국가해양법연구소로 확대 개편하기로 했다. 세계일보, “영토분쟁 대응 '국가해양법연구소' 설립”, 2020.07.28. 2020.12.13 최종 접속.
  5. 특히 1984년 발표한 "북한의 해양법 문제" 논문은 북한 해양법에 대한 최초의 연구로 평가되었으며, 《동아시아와 해양법》 영문 저서는 미국, 중국 등지의 대학 교재로 쓰이고, 중국과 러시아에서는 번역판이 나올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6. 국제해양법재판소 재임 시 박춘호 재판관이 참석하는 회의마다 그가 소개하는 조크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시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7. 황해의 석유탐사권으로 인한 중공과 일본, 한국과 북한 간의 분쟁,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간의 난사군도(Spratlys) 분쟁 등 동북ㆍ동남 아시아의 해양과 섬에 대한 소유권 분쟁은 지정학적 요인과 자원민족주의와 결부된 해양법상의 자구책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본서는 이러한 분쟁의 문제점과 그 국제법적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서술하였다.
  8. 국제적인 해양법학자의 자전적 에세이. 지리산골 평촌리의 유년시절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대학 복학, 문교부 편수관 시절, 꿈의 유학길 영국 에든버러, 국제해양법재판관으로서의 성공 등 국제적인 학자로 명성을 날리기까지를 회고했다.
  9. 박춘호는 1999년 1월 발효된 새 한일어업협정 체결 때 외무부 자문위원 대표로 활동하면서 "독도를 한국과 일본의 중간수역에 두도록 조언하고, 배타적 경제수역(EEZ) 협정과 관련해서도 독도 기점이 아닌 울릉도 기점을 주장했으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무시하고 대응하지 않는 게 유리하다“는 주장을 폈다. 다만, 동 협정 제15조에서는 “이 협정의 어떠한 규정도 어업에 관한 사항 외의 국제법상 문제에 관한 각체약국의 입장을 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된다."고 못박고 있다. 이와 관련 그가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며 국내 일각에서는 한국법률문화상 시상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