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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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동학 농민 운동의 일부
날짜1894년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 ~ 12월 7일(음력 11월 11일)[1]
장소
결과
교전국

동학 농민군

  • 북접
  • 남접
조선 조선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전봉준
손병희
신정희
허진
이두황
이규태
이기동
조병완
일본 제국 미나미 고시로
일본 제국 모리오 마사이치
병력
농민군 남접 1만여 명
북접 1만여 명
총병력 2만여 명
조선군 3,200여명
일본 제국 일본군 200여명
총병력 3,400여명

우금치 전투(牛禁峙戰鬪)는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인 1894년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 ~ 12월 7일(음력 11월 11일) 사이 공주를 놓고 벌인 농민군과 관군 사이의 결정적 전투였다. 양측은 두 차례의 접전을 벌였으며 두 번째 있었던 우금치의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퇴하며 동학 농민 운동은 급격히 쇠퇴하였다.[1]

배경[편집]

갑오세(甲午歲) 갑오세
을미적(乙未賊) 을미적
병신(丙申) 되면 못 가리
—  농민군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민요의 가사[2]

1894년 갑오년조선의 역사에서 여러모로 큰 획을 그은 한 해였다. 이해 초 고부에서 거병한 전봉준은 기존의 민란을 넘어서 중앙정치의 개혁을 요구하며 3월에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7일 전주화약을 맺어 일정 정도 성과를 보았다.[3] 고종은 농민군의 봉기 이후 청나라에 진압 지원을 요청하였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입국하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을 근거로 파병하였다.[4]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이 틈을 노려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7월 23일(음력 6월 21일)경복궁을 무단 점령하였다.[5] 새벽에 영춘문을 통해 기습한 일본군은 조선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고종에게 자신들의 요구안을 전달하였다. 이일로 일본과 청나라는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벌이게 된다.[6]

일본이 경복궁을 무단 침입하고 국왕을 겁박하였다는 소식은 전봉준이 서울 진격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7] 당시 동학은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과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의 입장에 차이가 있어 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는 납접과 달리 북접은 종교의 자유 획득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었고, 이 때문에 중앙정부와의 충돌을 피하는 분위기였다.[4] 그러나 청일전쟁으로 조선이 전쟁터가 되고 중앙정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남북접 모두 "척왜양이"를 내걸고 거병하게 되었다. 1894년 음역 9월 추수철이 지날 무렵 농민군은 다시 결집하였다.[8]

봄철 전주성 점령이 주로 전라도의 남접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던 반면, 가을철 봉기는 전라도와 충청도 농민이 합세하여 이루어졌다. 전봉준은 삼례에 집결하여 북진을 시작하였고[1] 최시형은 보은에서 북접을 결집하였다.[9] 논산에서 합류한 남북접 양측의 인원은 4만여 명에 가까웠다.[9]

논산에서 서울로 북진하려면 공주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요충지였고,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관군역시 공주를 반드시 지켜야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 협력하여 농민군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9월 21일 통위영장위영 소속 부대를 주력으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하고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임명하였다. 일본은 2개 대대 병력을 보내 조선의 관군을 돕도록 하였다.[10] 이로서 양측은 공주를 두고 전투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논산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인 우금치가 주요 전장이 되었다.

전투[편집]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11월 23일(음력 10월 26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성하영윤성영의 공격으로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금강 건너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홍성 농민군은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2만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우금치 전투[편집]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붙치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벱세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m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에 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져 음력 12월에 전봉준은 체포되고,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패배요인[편집]

경군이 보유했던 미국제 기관총.(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일본군은 후비보병이라 중화기는 전부 조선관군이 보유/운용하였다) 패배 요인으로 주목된다.

동학농민전쟁의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된 결전이었던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으로는, 크게 1) 보유 무기의 심각한 열세, 2) 연합전선 실패로 인한 병력 분산, 3)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과 지휘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로 무엇보다 보유 무기 면에서 관군·일본 연합군이 갖고 있던 무기의 화력이 동학 농민군에 비해 월등했다. 농민군의 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화승총으로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에 분당 2발을 발사하는 수준인데다 그마저도 갖지 못한 사람은 죽창으로 싸워야 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넘고 분당 12발을 쏠수 있는 신형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막강한 화력을 지닌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을 갖추었기 때문에 동학 농민군을 손쉽게 소탕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동학 농민군은 모든 힘을 한곳에 모으지 못하고 분산됐다는 점이다.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의 농민군 정예부대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공주 전투에 함께하지 못했고 결국 농민군은 병력면에서라도 확실한 우위를 가질수 없었다.

셋째,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과 지도자들의 전투를 지휘하는 기술이 부족했다. 일본군이나 관군에 비해 훈련되어있지 않고 무기도 보잘 것 없는 농민군에 불과했다는 점과, 미리 공주를 점령하지 못한채 결국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불리한 지형적 조건에서 싸웠다는 점도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우금치 전투 -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다, 한국사연대기, 우리역사넷
  2. 참언과 연대의 서사시 ‘가보세’, 여성농업인신문, 2014년 1월 2일
  3. 전주화약, 신편한국사, 우리역사넷
  4.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일본 군사들이 새벽에 영추문으로 대궐에 난입하다,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6월 21일 병인
  6. 청일전쟁 -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뒤바꾼 일본과 청의 전쟁, 한국사연대기, 우리역사넷
  7. 1894년의 총성, 일본의 경복궁 습격에서 시작됐다, 중앙일보, 2020년 7월 30일
  8. 나락 익기만 기다렸다, 한국농정, 2022년 10월 23일
  9. 우금치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우금치전투, 교과서 용어해설, 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