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성일 (15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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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4년 전 (Hakbong13님) - 주제: 저작권 관련 공지

저작권 관련 공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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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 선생에 대해 비꼬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조선왕조실록의 선조 25 년 6 월 28 일의 기록)을 확인해 보았으나, 조선왕조실록에 그 같은 기록은 없었습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당파가 다른 이항복의 학봉 선생에 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 (28 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 년) 2 월 6 일(기유) 1 번째기사) 임란을 분석할 때 찾아보게 되는 징비록의 기록 후의 서포 김만중의 서포만필의 기록 등 여러 기록은 학봉 선생이 깊은 뜻을 가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선조가 임란 중 초유사의 학봉 선생에게 내릴 때 주저함을 보였는 데, 당파를 떠난 관료들의 학봉 선생에 대한 일관된 평가로 인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조선왕조실록) (당파의 세력에 의한 결정이 아니었음)

당시 임란 중 조선은 이미 당파를 떠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고, 특히, 임란 중 학봉 선생이 보여준 구국 활동은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임란 3대 대첩이라 부르는 진주성 싸움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학봉 선생이 아니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Hakbong13 (토론) 2010년 1월 22일 (금) 11:09 (KST)답변